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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속 사진을 움직여라
박수영 초분자광전자재료연구단장 사진 변태섭 동아사이언스 기자 xrockism@donga.com
신문 속 사진이 움직이는 게 가능할까. 영화 ‘해리포터’에서처럼 죄수 번호를 손에 쥐고 있는 악당이 앞뒤좌우로 몸을 돌린다면 어떨까. 혹자는 마법 같은 이야기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이제 막 구현되고 있는 일이다. 최근 세계 최대 온라인쇼핑몰인 ‘아마존’은 전자북 ‘킨들’ 서비스를 시작했다. 전자종이에 텍스트를 넣어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 상상은 공상 너머 현실이 되고 있는 셈이다.

‘멋진 신세계’가 가능하게 된 건 바로 유기전자재료 덕이다. 이전까지는 주로 무기전자재료로 전자제품을 만들었다. 반도체를 만들 때 사용하는 실리콘 웨이퍼가 무기전자재료의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무기전자재료는 무겁고 깨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가격도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최근 연구자들 사이에서 유기전자재료가 각광받고 있다. ‘패러다임 전환’이다. 유기전자재료는 탄소를 기반으로 한 화학물질을 말한다. 일상생활에서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유기발광다이오드를 이용한 휴대전화(AMOLED), 액정표시장치(LCD)로 만든 대형 TV에서부터 복사기, 레이저 프린터, 2차 전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전자종이 역시 유기전자재료로 만들었다. 이처럼 유기전자재료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유기전자재료가 가볍고 유연해 휴대하기가 좋고 값도 싸기 때문이다.

초분자광전자재료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박수영 서울대 재료공학과 교수 역시 유기전자재료를 연구한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물질은 초분자광전자재료. 초분자와 광전자의 성질을 모두 갖는 유기전자재료다.

초분자는 각 분자가 수소결합과 같은 2차 결합으로 붙어있는 물질이다. 분자의 결합에너지가 100kcal/mol 이상인 화학결합, 이온결합으로 연결된 고분자와 달리 초분자의 결합에너지는 10kcal/mol 이하다. 때문에 온도와 같은 외부자극으로 분자를 쉽게 붙였다 뗄 수 있다. 광전자는 말 그대로 빛과 전기에 대한 특성을 모두 갖는 물질을 말한다. 요악하면, 초분자광전자재료는 빛과 전기에 특이적인 성질을 갖는 초분자 구조체란 말이다.

2002년, 고정관념을 깨다

이리듐 화합물의 화학구조를 바꿔서 색을 바꿀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영국화학회에서 발행하는‘달턴 트랜색션즈’표지로 소개됐다. 사진제공 초분자광전자재료연구단
이전까지 연구그룹들은 주로 단일분자를 주로 연구했다. 분자에 전기를 흘리면 분자가 순간적으로 에너지를 얻어 들뜬 상태가 됐다가 원래 상태로 돌아오면서 빛을 내는 형광 현상에 집중한 것. 사실 이는 불가항력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분자를 붙여 초분자체로 만들면 형광현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농도소광’이라 불리는 이 현상을 일반적인 것으로 여겼다.

“초분자체를 만들면 형광 세기가 약해지다가 결국엔 없어지는 현상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농도소광을 줄일 수 있을까 하는데 쏠려 있었죠.”

하지만 박 교수가 2002년 12월 미국화학회지(JACS)에 발표한 한 논문은 이런 고정관념을 산산이 깨뜨렸다. 분자가 모여 초분자를 이룰수록 빛을 더 잘 내는 새로운 물질(CN-MBE)을 개발한 것. 농도소광 대신 ‘농도발광’이라 불린 이 현상은 당시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이후 박 교수는 농도발광 특징을 갖는 여러 물질을 개발했다. 박 교수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논문을 많이 인용한다”고 귀띔했다.

통상 박 교수의 논문인용횟수는 매년 400회 정도. 올해 8월까지만 364회가 인용됐다.

올해만 벌써 논문 10편…그 중 5편이 표지로

박 교수는 빛을 내고 반도체성 있는 유기나노와이어 물질을 개발해 나노기술 분야 학술지 ‘스몰’에 발표했다. 다음은 박 교수의 연구결과가 소개된 ‘스몰’의 표지. 사진제공 초분자광전자재료연구단
박 교수는 최근 분자 하나로 흰색 빛을 내는 ‘분자 전구’룰 세계 최초로 만들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보통 형광물질은 분자 모양에 따라 독특한 색을 낸다. 하지만 자체적으로 흰빛을 내는 분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때문에 기존에는 빛의 삼원색인 빨간색, 녹색, 파란색을 섞어 흰빛을 만들었다.

박 교수는 한 쪽은 파란빛, 다른 쪽은 노란 빛을 내는 형광분자로 연결된 ‘W1’이라는 새로운 분자를 만들었다. 두 빛은 보색관계로 섞이면 흰빛이 난다. 이 연구는 JACS 9월호에 실렸다. 박 교수는 “내년 5월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디스플레이학회에 초청받아 분자전구와 관련한 연구를 세계 여러 과학자들 앞에서 설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7월에는 자외선을 쪼이거나 온도를 높이면 분자들이 서로 결합해 초분자체를 이루며 빛을 내는 물질을 개발해 독일화학회가 발간하는 화학분야 권위지 ‘안게반테 케미’에 발표했다. 두 개의 자극에 반응해 빛을 내는 초분자체를 만든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연구는 ‘네이처 케미스트리’ 8월 28일자에 ‘하이라이트’로 소개되기도 했다.

박 교수는 올해에만 벌써 논문 10편을 발표했다. 그 중 5편이 JACS, 나노기술 분야 학술지 ‘스몰’, 그리고 영국화학회에서 발행하는 ‘달턴 트랜색션즈’ 등에 표지논문으로 소개됐다.

작은 물질이 몰고올 일상의 큰 변화

유기전자재료의 발전 가능성은 크다. TFT-LCD와 AMOLED만 봐도 그렇다. TFT-LCD는 색재현율이 70% 수준. 반응속도는 30ms(밀리초·1ms는 1000분의 1초)에 그친다. 반면 AMOLED의 색재현율은 100%. 반응속도는 0.01ms다. 박 교수는 “유기전자재료가 계속 발전하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도 큰 변화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한 일례로 전자태그(RFID)를 꼽았다. RFID는 칩과 무선으로 식물, 동물 등 다양한 개체의 정보를 인식할 수 있는 첨단관리기술이다. “현재 RFID를 인쇄해 생산하려는 연구가 진행 중이에요. 앞으로는 반도체를 만들 때처럼 먼지를 막기 위한 방진복을 입고 작업할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죠.”

● 박수영 교수 약력

1976~1980 : 서울대 섬유공학과 학사
1980~1982 : 서울대 섬유고분자공학과 석사
1983~1988 : 서울대 섬유고분자공학과 박사
1985~1995 :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선임연구원
1992~1993 : 일본이화학연구소 초빙연구원
1995~2005 : 서울대 섬유고분자공학과 조교수·부교수
2005~현재 :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2009~현재 : 초분자광전자재료연구단장

초분자광전자연구단은?

초분자광전자재료연구단의 모습. 박사후연구원 1명, 박사과정 10명, 석사과정 6명으로 구성됐다. 사진제공 초분자광전자재료연구단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라.”

박 교수가 연구원들에게 강조하는 말이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란 뜻이다. 이를 위해 박 교수는 해당 분야의 기본 지식부터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연구원들이 새로운 것을 해보려면 먼저 그 분야의 기본 지식부터 익히라고 말해줘요. 다른 연구그룹은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세계 동향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한다는 거죠. 머리에 든 게 있어야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매년 400회 이상 인용횟수를 기록하는 초분자광전자재료연구단의 비법은 기본에 바탕을 둔 창의성이었던 셈이다. “남을 흉내내진 않습니다”란 박 교수의 말에서 깊은 자신감이 묻어났다.

박사후연구원 1명, 박사과정 10명, 석사과정 6명으로 구성된 연구단은 올 4월 창의적연구진흥사업단에 선정됐다.

글/변태섭 동아사이언스 기자 xrockism@donga.com (2009년 0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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